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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u 2 : 00/sto ri a .

결실

by 홍 이 꽃 이 다 2022.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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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렬식 독서를 하는 내 주위에는 책이 여기저기 있다.
화장실에,
침대맡에,
거실 테이블 위에,
좋아하는 의자 옆에,
한때 모든 게 짐으로 느껴져 읽은 책은
서둘러 정리를 하고 이북으로 읽던 때가 있었는데
책을 가장 많이 읽었던 해이기도 한데 반해
책의 물성을 느끼며 맛있게 읽는 방법은
잊었던 때이기도 하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 방법으로 바뀌었다가
신간을 빨리 만지고 읽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다시 올라왔다.
책만큼은 (다른 것도 이미) 미니멀을 배제하자 하고
이북도 읽고, 빌려도 읽고, 사서도 읽고 하는 중이다.
그때부터였다. 전에는 절대 용납할 수 없었던
책에 줄 긋기,
도그 지어 접기,
반 접어 말아 읽기
등등 책 괴롭히며 읽기에 심취하게 되었다.
(허나 아직 줄이 삐뚤거리게 그어지면 참지 못한다)

그리고 또 그때 쯤이었다.
어릴적부터 마음을 들키는게 가장 두려웠었다.
그래서 눈물도 말랐고
그래서 책을 읽을때 마음을 들킬까
밑줄을 긋지 못하고 읽었던거 같다.
그리고 다이어리에도 온갖 암호같은 말들을 적어놓고선
다음에 펼쳐봤을때는 나조차 무슨 뜻인지 몰라
갸우뚱 되기 일 쑤였다.

그러다 눈동자 흰자위가 인간만 유일하게 크다는것
이미 마음을 들키라고 만들어져 태어난건데
구지 그것을 두려워 할 일도
숨길 일도 아니란 것을 자각 한 후부터
여기저기 마음을 훌렁훌렁 드러내놓고,
귀찮을 정도로 많이 울고,
(조금 숨겨도 되지 않을까 할 정도로 많이)
책도 열심히 줄 긋고 읽게 된 것 같다.

띠지는 싫어한다.
마음에 드는 띠지는 정말 흔치 않다.
물건을 사면 비닐은 바로바로 떼야하는 아이인데
띠지는 나한테 그 비닐 같은 거다.
책이 도착하면 띠지는 바로 버린다.

암튼

라봉이를 안 지는 20년이 넘었고,
사귄 지는 10년이 넘었고,
결혼한지는 8년 차이다.
그 많은 시간 동안 들어보지 못했던 말을 한다.
"나 처음에 읽기 쉬운 책 좀 하나 추천해줘봐바"
책 읽기 취미를 한 번 가져볼까 라며
진심 좋아.
내가 책 좋아하는 이유도 책을 가까이하는 아빠 밑에서
자라 자연스레 그리되었다 생각했는데 맞았어. 맞던 거였어.
결실을 이루었다. 아.. 어떤 책이 좋을까?
무조건 에세이로 시작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처음에 힘주었다가 중간에 확 힘 빠지는 책 말고
뭐 있었지 빨리빨리
라봉이 나이에 공감 가는 책이 좋을 거 같은데.

어떻게 온 기회인데 망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골라준 첫 책이 마음에 꼭 맞아 같이
독서의 블랙홀로 빠져들고 싶은 마음이다.
나에게 너무 좋았던 책이 라봉에게도 좋을까?
정말 오랜만에 독서를 하는 사람에게 추천하는
책은 뭐가 좋을까?

라봉은 짠한 감정으로 위로받고 마음 놓아하는 사람인데
내가 요새 읽은 책들은 과학책 90%,
실리콘밸리 관련 책, 철학책, 실용서뿐
그나마 자기 전에 읽는 그리스 신화 합본 책이
재미있지만 얼마 만의 책인데 벽돌을 던져줄 수도 없고,
위트도 조금 있었으면 좋겠는데
피식피식 웃다 보면 마지막 장을 덮게 되고
짠한데 1% 정도 생각도 바꿀 수 있는 책 뭐가 있던가ㅠ
저 맘이 시들어 들까 내 맘이 조급해진다.



조급하던 사이 많은 일이 있었고
나는 절호의 기회를 날려버렸다. 젠장.
그러고 머지않아 다음 기회가 곧바로 찾아왔는데
나는 그냥 여러 고민 없이 툭 던져주었다.
[선물]이라는 빨간 책을
그냥 쏘쏘 좋았다고 한다.

근데 그 책은 다른 놈이 선물해준 책인 거는 우리끼리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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